2001. 9. 『하바드 한국학의 요람』, 을유문화사


옌칭 한국 도서관에서의 체험과 기대


김  현1)


I.


  1997년 8월부터 1년 간, 한국학연구소의 방문연구원으로 하버드 대학에 체재하였던 나에게 옌칭 도서관의 한국학 라이브러리(Korean Section)는 일과 휴식이 함께 한 소중한 생활 공간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이른 바 “문과(文科) 프로젝트”라고 하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연구의 마무리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지배 계급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는 목적에서 14,600명의 문과 합격자의 가계, 혼인, 거주지 등을 샅샅이 조사해 온 이 연구 프로젝트는 하버드의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와 그의 한국인 동료 송준호 교수에 의해 1960년대 중반부터 30년이 넘게 진행되어 온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의 나의 역할은 두 노학자가 작성한 자료 카드를 전산화하여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일이었다. 미국에 오기 3년 전에 이미 그들로부터 자료의 많은 부분을 건네 받아 데이터베이스의 골격을 갖추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1년 동안 강도 높은 마무리 작업을 수행하면 오랫동안 실체를 보이지 못했던 이 데이터베이스의 간행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나는 와그너 교수와 송준호 교수를 일 주일에 두 세 번씩 만나면서 자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송 교수의 조교 이재옥 군의 도움을 받아 데이터베이스 편찬 업무를 진행하였다. 투여한 시간과 노력이 적지 않았지만 일년 동안 이루어낸 성과는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송 교수는 이미 만든 자료의 정리보다는 빠뜨린 정보를 더 보충하여 보다 완벽한 연구 성과를 내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미완성의 저작이라도 정리마저 안 돼서 창고 속에 묻히기보다는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정보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나의 설득에 대해 두 분의 노교수가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빠뜨린 정보를 보충하는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십년간 그 일을 해 온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으면 영원히 불가능해진다고 하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단기간이 이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은 포기한 채, 현재까지 수집된 자료와 더 보완될 자료의 유형을 분석하여 일관된 체계를 정하고 각종 인덱스를 기계적으로 산출하여 작업 진행의 효율성을 돕는 정도의 일을 수행하였다.

  결과적으로 1998년까지 마무리지으려고 한 문과 프로젝트는 3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진행중”인 상황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조선왕조실록 DB 개발을 사업을 지원하였던 이웅근 회장이 이 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재정 지원을 하기로 함으로써 데이터베이스의 간행이 현실화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송교수를 도와 헌신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던 이재옥 군도 지금 이웅근 회장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프로젝트의 마무리에 전념하고 있다.

  나의 하버드 체재 기간 동안 문과 프로젝트가 강도 높게 진행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나 자신은 개인적인 공부에도 시간을 할애하며 지적인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여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나의 여유 시간의 많은 부분이 조선시대의 한문 문집을 읽는 데 바쳐졌다. 한국학 라이브러리 지하 2층 고서 서고의 조선시대 문집 원본을 나만큼 유용하게 이용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서가에서 필요한 책들을 마음대로 골라 바닥에 펼쳐 놓은 채 옛책의 향기를 마음껏 즐기면서 자료 찾기에 열중할 수 있었고, 거기서 얻어진 자료들을 가지고 한국 유교의 종교성에 대한 논문을 집필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II.


  문과 프로젝트나 한국 유교의 종교성에 대한 연구 같은 것을 굳이 미국에까지 가서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일을 굳이 해외에 가서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한국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그 일을 “옌칭 도서관” 안에서 수행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옌칭 도서관의 코리언 섹션은 한국에 대한 모든 자료를 총망라해서 보유하고 있는 대형 도서관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은 도서관은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데 필요한 기본 자료들을 충실히 모아서 제공한다고 하는 뚜렷한 목적과 색채를 가지고 있는 도서실이다.

  서울과 보스턴의 시차는 14 시간. 지구의 정반대편에 있는 그곳에서 한국의 지난 수백년간의 과거를 정리하여 객관화시키는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대부분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시대 연구의 스칼라쉽을 떠받치고 있는 지식 인프라가 그 정도 수준에 이른 것은 단순히 자료 구입 재원이 풍부한 데 원인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도서관의 전문성은 자기 도서관의 존재 목적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역량 있는 운영 책임자의 있음으로서만 확보될 수 있다.

  코리안 색션의 열람석 옆 콘크리트 기둥에 걸려 있는 빛 바랜 사진의 주인공 김성하 선생.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의 나라로만 인식되던 우리나라의 진정한 문화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첫걸음은 그곳에 한국 연구의 지적 지반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한국학 도서관을 키우는 데 헌신하다가 급기야는 도서관 집무실에서 순직한 인물. 그가 바로 옌칭 도서관 코리언 색션을 국제적인 한국학 전문 도서관으로 키운 장본인임을 알고 난 후, 나는 그 소박한 액자의 사진을 볼 때마다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사 연구를 시작하여 그곳이 서구의 한국학 연구 중심지가 되게 한 인물로 의례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를 지목하지만, 그와 그의 제자들의 연구 자료가 된 한국의 문헌들을 집성한 김상하 선생의 역할이 없었다면 하버드의 한국학은 결코 현재와 같은 위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김성하 선생의 바톤을 이어 오늘의 옌칭 한국학 도서관을 국제적인 한국학 교류의 중심지가 되게 한 공로자는 현재의 코리언 색션 헤드 윤충남 선생이다.

  한국학 분야에 있어 하버드 대학이 존재는 단순히 한국학 전공을 개설한 대학 중의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과 서구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서로의 연구 성과를 주고받는 한국학의 국제적인 교류의 무대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 무대 위로 또는 조명이 비치지 않는 주변 언저리로 국내외 수많은 한국학 관계자들이 스쳐 가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는 옌칭 도서관을 출입하는 동안, 그 관계자들 사이의 교류와 담론에서 흘러나오는 갖가지 정보를 빠짐없이 챙겨서 그것을 도서관 자원 확충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윤충남 선생의 역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윤 선생이 하버드 대학원의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각처에서 온 방문 연구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한국학의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으며, 어떠한 내용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 사회, 역사, 예술 등 여러 연구자의 다양한 학문 내용의 핵심을 그만큼 심도 있게 파악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윤충남 선생은 내가 다른 곳에서 일찍이 만나지 못했던 ‘한국학의 제네럴리스트’였다. 그는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현지의 한국학도들에게 전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간의 교류를 주선하며 학생 개개인의 관심과 능력에 적합한 연구 주제를 찾는 일을 돕는다. 이 가운데 연구 자료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윤 선생은 해외에서의 한국학 연구에 필요한 새로운 자료의 간행에 항상 관심을 모으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하버드에 가기 전에 이미 한국에서 윤 선생을 만나 본 경험이 있다. 1996년 겨울 윤선생이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구입하기 위해 당시에 내가 일하던 회사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때 윤 선생이 나에게 남기고 간 이야기는 “만들기만 하면 뭐 하느냐? 이 CD-ROM의 입수 경로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는 핀잔뿐이었지만, 당시까지 한국 국내 도서관의 어느 사서도 이 CD 때문에 나를 찾아온 적이 없던 상황에서 미국에서 온 이 방문객의 열정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 이듬 해 내가 하버드에 갔을 때, 당시의 한국사 담당 교수 마일란 하이트매넥은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교재로 삼은 수업을 진행했었고, 수강생들에 의해서는 실록 CD-ROM 검색 자료를 토대로 한 여러 편의 예비 논문이 산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버드에서 한국 문화를 배우는 학생들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사에 전반에 대한 지식이 있다거나 연구 방법론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학생들보다 우수한 면이 있지만 우리말 문헌을 읽는 독서 능력은 한국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겪는 자료 찾기의 어려움은 한국 학생들이 영어로 된 문헌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일보다 몇 배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400권이 넘는 분량의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 필요한 정보를 즉석에서 뽑아 주는 조선왕조실록 CD-ROM은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외국의 한국학도들에게 긴요한 공구서가 아닐 수 없다. 윤 선생은 바로 그러한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새로운 전자도서가 간행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할 때마다, 그것들을 사들였고 학생들에게 적극적인 활용을 권장하였던 것이다.


III.


  나의 미국 생활은 하버드에서의 1년이라기보다는 옌칭에서의 1년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만큼 거의 모든 생활이 옌칭 도서관과 관련을 맺고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도서관과 맺은 인연은 나 자신의 방문기간으로만 그치지는 않았다. 내가 귀국한 지 1년 반만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근무하는 나의 아내2)가 옌칭 도서관의 한국학 고서 해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1년간 그곳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한국에 남고 아내가 미국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혹자는 남편과 아내가 번갈아 외국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피차에 공평하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단신으로 미국 생활을 했던 반면,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도서관 업무와 두 아이들 유학(?) 뒷바라지의 이중 부담을 안고 생활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내가 맡은 한국 고서 프로젝트는 도서관에서 풀 타임 근무를 해야 하는 조건의 일이었기 때문에 흔히들 생각하는 여유 있는 방문 연구원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년 동안 코리언 색션의 한문 도서를 정리하고 해제를 만들어 낸 아내에 의하면 그곳의 도서 자료 중에 고서로 분류될 수 있는 해방 이전의 서책은 모두 4,00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아내가 일년 동안 그 책들을 일일이 뒤적여서 내용을 확인하고 작성한 해제는 약 500여 편.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처럼 한문 고서에 파묻혀 지낼 수 있던 것은 더없이 유익하고 소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족들이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다시 세 번에 걸쳐 하버드 옌칭 도서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코리언 색션의 도서들을 다시 접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은 아내의 일을 돕는답시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서고에 들어가서 내가 골라주는 고서들의 분류기호를 몇 시간씩 베껴 적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아이들은 물론 “재미없다”고 불평하였지만, 나는 이 도서관의 책들이 한국 문화를 세계 속에 전파하는 소중한 자산들이고, 너희들은 지금 그 직접 만져보는 소중한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IV.


  이제는 너나 없이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교류하는 이른바 국제화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근대화 과정에서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던 우리에게 있어 나의 문화의 진정한 모습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 문화의 깊이를 세계에 알리는 것은 국정홍보처의 한국 안내 브로셔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국 아이들은 스시 먹는 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하나봐. 어떤 애가 부모와 스시 먹으로 간다고 하니까 모두들 부러워하던데?” 딸 아이가 간파한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 와스프(WASP)들의 문화의 한 단면이다.

  내가 미국 체제 기간 동안 접했던 교양있는 미국인들은 대부분 친일파(?)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과장이 아니다. 응접실 한 구석에 일본 자기와 인형으로 꾸며진 제패니즈 콜렉션 코너를 설치하고 노(能)와 가부키(歌舞伎)의 예술성에 감탄하며 사쿠하치(尺八, 일본 퉁소) 음율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들 .....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의 상징과도 같은 보스턴 미술관에는 일본식 정원이 거대한 옥외 전시물로 자리하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미국의 정신(Spirit of America)을 자부하는 뉴잉글랜드 지식인들의 친일적 사고의 진원지는 자동차나 가전제품이 아니라 미국의 일본학자들에 의해 심도 있게 연구되고 심미적으로 윤색되어진 일본학이다. 일본 문화의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거기에 심취해 버린 지식인들에 의해 “동양의 문명 국가 일본”의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그 긍정적 이미지가 일본의 국가 홍보의 근간이 되어 곳곳에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하버드는 한국인에게 있어 해외 한국학 연구의 중심지로 비춰지지만, 실상에 있어 그 대학의 동아시아 연구(East Asian Studies)는 일본과 중국을 위주로 하는 것이며 한국은 아직까지 곁가지에 불과한 실정이다. 동양학 관계 서적이라고 하더라도 서구인에게 직접 읽힐 수 있는 영문 서적은 주로 하버드 대학의 중앙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와이드너에 소장되어 있다. 중국학이나 일본학 서적과 비교해 볼 때 이곳의 한국학 관계 서적은 거의 그 존재조차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이다. 나와 같은 시기에 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으로 와 있던 한 교수는 이를 두고 “하버드에 한국은 없다”고 푸념하였다.

  지금 글로벌라이제이션(Globlization)은 한국의 국가적 표어이지만, 그 세계화의 촉매 역할을 해야 할 해외 학국학 연구는 아직도 맹아기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와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이 야기한 이 열악한 조건 속에 그나마 동양의 원어 자료를 수집하는 옌칭 도서관의 코리안 색션이 한국학 연구 인프라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사실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 그것도 유효기간이 정해진 대중 도서나 시사 자료가 아니라 기초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고전을 소장한 도서관의 존재는 언제라도 그 분야의 연구자가 배출될 수 있음을 담보한다. 이 도서관이 제공하는 지적 자원을 통해 해마다 한 사람 두 사람씩 한국에 대한 세계의 이해의 길을 열어 갈 한국학 연구자들이 배출될 때, 비로소 현재의 일본이나 중국에 필적하는 한국의 국가 홍보가 가능해질 것이다.

  옌칭 도서관 코리언 색션 설립 50 주년. 50년의 세월은 짧은 기간이 아니지만 그 세월만이 오늘의 한국학 옌칭 도서관을 있게 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김성하, 윤충남 두 분의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과 긍지, 세계 속의 한국학 연구의 중심지를 가꾸어 온 노력을 감사의 마음으로 되새기며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한다.




1) 1987-1988 한국학연구소 방문연구원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정보기술부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 이순구, 2000 1-12 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